07-28-19 나귀 새끼

정치와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때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심을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며 기대하며 큰 소리로 소리질러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공의 길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세상 성공의 중심에서 자신을 드려 그 성공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의 환호 길에서 예수님은 어떤 설교도 할 수 없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몸으로 보이시는 설교를 하십니다. 그 설교의 도구는 목소리 대신에 나귀 새끼 한 마리였습니다. 말에 비해서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지요. 멋있지도 않고 약해보입니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귀는 길게 늘어져 활동적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중에도 새끼 나귀였습니다. 새끼라고 해서 이제 난 것이 아니라 그래도 탈만한 정도로 성장한 나귀입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에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고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바로 겸손이라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성공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그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나귀를 탈 용기를 내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놓친 사람들이 죄다 나귀를 말로, 마차로 바꿔 타는

07-21-19 열 므나 비유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열 므나 비유’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달란트의 비유’로 바뀝니다. 므나는 은화이고 1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것이고, 달란트는 금화인데 60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가치입니다. 먼저의 비유는 여리고 성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나중의 비유는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당시 장사꾼들이 모이는 상업도시였고, 감람산은 예수께서 장차 승천하실 장소였습니다. 즉 먼저 것은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신 것이고, 나중 것은 충성의 열매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열 명의 종에게 똑같이 나누어 준 한 므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를 의미한 것이고, 다르게 준 달란트는 재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사명과 은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받은 기회의 므나는 노력에 따라 그 성과와 보상이 달랐습니다.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고을 권세를 차지했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했습니다.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받은 만큼의 성과를 거두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자는 죽임을 당했고 재능을 묻어 두었던 자는 흑암 속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인생은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길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서서 계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삶에 비해 이 땅에서의 인생은 지극히 작은 것에

07-14-19 삭개오처럼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목사가 심방을 가겠다고 하면 모두 기쁘게 “언제든 오세요.”라고 말했지만 요즘은 심방을 가겠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합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면 집 청소를 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시나 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중에 피곤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방하셔서 사람들의 아픈 마음과 육신을 치유해주셨고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을 찾아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로 들어가면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돈 많은 사람이기에 그에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대접받는 것이 좋아서 삭개오의 집으로 대접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 할 곳도 많고 찾아가야 할 사람도 많았지만 여리고로 들어가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삭개오를 부르셨고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07-07-19 우리를 불편하게 하소서

맹인 바디매오가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불편함이 예수님을 찾게 되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눈도 뜨고 영혼의 눈도 뜨고 사명의 눈까지 뜨게 된 것을 봅니다. 16세기(1577년) 영국의 항해가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이 쓴 시를 소개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에 만족해 있을 때, 우리가 너무 작은 꿈을 꾸었기 때문에 우리의 꿈이 쉽게 이루어 졌을 때, 우리가 해변을 끼고 너무 가깝게 항해하여 목적지에 안전 하게 도착했을 때. 우리를 불편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여 생명수에 대한 갈증을 상 실해 버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영생을 꿈꾸는 것을 잊어 버렸다면, 새 땅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하느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어두워졌다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소서. 주님! 더욱 용감하게 모험하도록, 너무 해변에 가까이 있지 말고 바다 먼 곳으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를 밀어 내소서, 더 이상 땅이 보이지 않을 때 별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소망의 지평선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밀어 내소서, 미래를 위한 힘과 용기와 소망과 사 랑을 위해. 우리를 불편하게 하소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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